눈 내리는 날
취송 황형자 시인의 첫 시집이 나왔다.
‘숫눈을 밟는다’ 시집의 맨 마지막에 수록된 다음 작품은 시인의 삶을 압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황형자 시인에게 ‘눈길’은 큰딸과 큰며느리로 살아온 생애의 통점. 그 트라우마를 의식의 표층으로 끌어올리는 공간이며 그것은 시린 꿈의 우듬지가 자꾸 흔들리던 겨울이라는 시간과 함께 존재한다.
숫눈은 눈이 내려 쌓인 후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다. 모두가 잠든 새벽에 내려서 쌓인다는 점에서 혼자 눈물을 삼켜야 하는 큰딸과 큰며느리의 성장과 유사하다. 요즘은 많은 것이 변하고 있지만, 예전의 가족제도에서 큰아들, 큰딸, 큰며느리 등 큰 자가 붙은 존재들은 다른 사람에 비해 더 무거운 기대 속에서 큰짐을 짊어진 채 살아가야 했다.
속울음을 삼키며 새벽녘에 숫눈을 밟는 정경은 황형자 시인의 모습이었다.
'눈길'
숫눈을 밟는다
산기슭 쭈뼛쭈뼛 일어서는 바람 맞으며
마디 굵은 흉터 남긴 소나무처럼
시린 꿈의 우듬지가 자꾸 흔들리던 겨울
가장 추웠던 시절이 지나가고
내 생에서 막막했던 날들이 지나가고
나 여기까지는 걸어왔구나
새벽의 내재율이 내 몸을 감싼다
큰딸로 잠든 동생들 이불을 덮어주고
큰며느리가 되어 혼자서 울어야 했지
어떤 무늬도 일렁이지 못하고 입 다문 물병 속에선
푸른 물소리 출렁이는데
항상 파리한 낮달이 결빙된 하늘에
보이는 듯 안 보이는 듯 떠 있었지
숫눈이 나를 밟는다
꿈결처럼 나를 다녀간 이 길을
한번은 걸었던 것 같기도 하고
영영 처음 걷는 길인 것 같기도 한
미몽의 새벽이면
발자국이 내 생애를 밟는다
박성민 시인은 황형자 시인의 시에 대해 “취송의 시는 본질적으로 모성적인 사랑을 토대로 고향 강진에서의 가슴 저린 기억과 같은 장작들이 모여 시적 언술 방식으로 타오름으로써, 모닥불의 온기를 느끼게 하고 있다”며 “시인은 바다와 섬을 근간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에게도 따스한 눈빛을 보내고 있으며, 삶의 본질과 실존에 대해서 고민하기도 하고 그리움과 사랑의 풍경을 짙은 페이소스로 형상화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황형자 시인은 그런가 하면 깊이 있는 자아 성찰과 함께 생태시의 가능성까지 보여주고 있다”며 “나지막 하지만 흡입력 있는 황형자 시인의 시는 진정 우리가 무엇을 소망하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준다”고 말했다.
나지막하지만 흡입력 있는 시를 그리는 취송 황형자 시인은 이제는 어머니, 할머니로서 숫눈을 바라보며 진정 우리가 무엇을 소망하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준다.
황형자 시인은 전남 강진에서 태어나 국립 목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2019년 해남문학 신인상을 받았고, 2020년 시조시학(시조), 2023년 문학청춘(시)로 등단했다.
취송 황형자 시인의 첫 시집 ‘숫눈을 밟으며’는 지난 12월 7일 도서출판 황금알에서 펴냈다.
이성수 글로벌에픽 기자 lss@globalepi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