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최근 삼성 임원들에게 '사즉생(死卽生, 죽고자 노력하면 산다)'의 각오로 그룹의 생존이 걸린 복합 위기 상황에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삼성다운 저력을 잃었다"는 질책도 이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말 부당합병·회계부정 혐의 2심 공판 최후진술에서 "최근 들어 삼성의 미래에 대한 우려가 매우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언급한 이 회장이 이번에는 '사즉생'까지 언급하며 현 상황의 심각성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삼성은 지난달 말부터 삼성전자를 비롯한 전 계열사의 부사장 이하 임원 약 2000명을 대상으로 '삼성다움 복원을 위한 가치 교육'을 진행 중이다. 17일 재계에 따르면 이 교육 과정에서 이재용 회장의 메시지가 공유됐다. 이는 그만큼 현재 삼성이 처한 복합 위기 상황이 기업의 생존이 달릴 정도로 심각하다고 판단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교육에서는 고(故) 이병철 창업회장과 고 이건희 선대회장 등 오너 일가의 경영 철학이 담긴 영상이 상영됐다. 이를 통해 삼성의 창업 정신과 경영 철학을 재확인하고 위기 극복의 지혜를 찾고자 하는 의도로 해석된다. 여기에는 이재용 회장의 기존 발언들과 함께 올해 초 신년 메시지로 준비했던 내용도 일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영상에 이 회장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았다.
이 회장은 영상에 담긴 메시지를 통해 "삼성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존의 문제에 직면했다"며 "경영진부터 통렬하게 반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위기라는 상황이 아니라 위기에 대처하는 자세"라며 "당장의 이익을 희생하더라도 미래를 위해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단기적 성과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투자와 혁신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술의 중요성도 거듭 강조됐다. 이 회장은 그간 "기술 중시, 선행 투자의 전통을 이어 나가자. 세상에 없는 기술로 미래를 만들자", "첫 번째도 기술, 두 번째도 기술, 세 번째도 기술"이라며 기술 경쟁력의 중요성을 역설해왔다. 이는 삼성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술 혁신이 필수적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해석된다.
세미나에서는 교수 등 외부 전문가들이 외부에서 바라보는 삼성의 위기 등을 주제로 강연했다. 이 자리에서는 "실력을 키우기보다 '남들보다만 잘하면 된다'는 안이함에 빠진 게 아니냐", "상대적인 등수에 집착하다 보니 질적 향상을 못 이루고 있는 것 아니냐" 등의 지적도 잇따랐다. 이는 삼성이 그동안 시장 점유율이나 순위에만 집중하고 근본적인 경쟁력 강화에는 소홀했다는 외부의 비판적 시각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참석자들은 내부 리더십 교육 등에 이어 세부 주제에 관해 토론하며 위기 대처와 리더십 강화 방안 등을 모색했다. 이는 단순히 위기 상황을 인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해결책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삼성의 위기 극복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세미나에 참석한 임원들에게는 각자의 이름과 함께 '위기에 강하고 역전에 능하며 승부에 독한 삼성인'이라고 새겨진 크리스털 패가 주어졌다. 이는 단순한 기념품이 아닌 위기 극복에 대한 각오를 다지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한 참석자는 "여기(크리스털 패)에 새겨진 내용이 사실상 이번 세미나의 핵심"이라며 "'삼성다움'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독한 삼성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다른 참석자는 "그동안 삼성이 너무 자만했다는 문제의식과 함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고 더 독해져야 한다는 취지가 전달됐다"며 "그만큼 현재의 삼성이 절박하다는 위기의식도 느낄 수 있었다"고 전했다. 이는 그간 삼성이 글로벌 시장에서의 성공에 안주하며 위기 감지와 대응에 소홀했다는 자성의 목소리로 해석된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삼성전자의 실적 부진과 무관하지 않다.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에서 범용(레거시) 메모리의 부진과 고대역폭 메모리(HBM) 납품 지연 등으로 지난해 시장의 기대에 못 미치는 실적을 냈다. 특히 AI 반도체 시장에서 경쟁사 대비 뒤처지는 모습을 보이며 기술 경쟁력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금융투자업계 전망치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올해 1분기 영업이익은 5조1168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2.54% 감소할 것으로 예측됐다. 실적 전망치는 최근 들어 5조원대 밑으로 낮아지는 추세다. 연합인포맥스가 최근 2개월 내 보고서를 낸 증권사 21곳의 실적 컨센서스(전망치)를 집계한 결과에서도 삼성전자의 실적 하락이 예상되고 있다.
2024년도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TV 시장 점유율이 2023년 30.1%에서 지난해 28.3%로 하락했고, 스마트폰(19.7%→18.3%), D램(42.2%→41.5%) 등 주요 제품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도 전반적으로 하락했다. 이는 주력 사업 전반에 걸친 시장 지배력 약화를 의미하며, 이재용 회장이 강조한 위기 상황의 실질적 증거로 볼 수 있다.
다만 미래 준비를 위한 연구개발비와 시설투자비는 지난해 각각 35조원과 53조6000억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이는 당장의 이익보다 미래 경쟁력을 위한 투자를 우선시하는 삼성의 전략이 반영된 것으로, 위기 상황에서도 미래를 위한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그룹 전반의 복합 위기 타개를 위해 지난해 말 삼성글로벌리서치 산하에 신설한 경영진단실은 지난 1월 반도체 설계를 담당하는 시스템LSI 사업부에 대한 경영진단에 착수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디바이스경험(DX) 부문의 미래 사업 발굴을 위한 '신사업 태스크포스(TF)'를 신사업팀으로 격상시키며 미래 먹거리 발굴과 대형 인수·합병(M&A) 등에 대한 기대감도 커진 상태다. 이는 내부 혁신과 새로운 성장 동력 발굴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는 삼성의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삼성인력개발원이 주관하는 이번 세미나는 임원의 역할과 책임 인식 및 조직 관리 역할 강화를 목표로 경기 용인에 위치한 인력개발원 호암관에서 다음 달 말까지 순차적으로 열린다. 삼성이 전 계열사 임원을 대상으로 세미나를 진행하는 것은 2016년 이후 9년 만이다. 삼성은 앞서 2009년부터 2016년까지 매년 임원 대상 특별 세미나를 개최한 바 있어, 이번 세미나의 재개는 그만큼 현 상황의 심각성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전문가들은 삼성전자가 주가 박스권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고성능컴퓨팅(HPC)용 반도체의 근원적인 경쟁력 상승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최근 노근창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삼성전자 D램 출하량을 보면 모바일 D램이 경쟁사 대비 높으나 상대적으로 고대역폭 메모리(HBM)와 서버D램 같은 HPC용 D램 비중은 낮다"며 "HPC 파운드리에 '티어1'(1급) 고객이 미미하다는 점에서 DS 사업부가 HPC 비중을 높이는 것이 주가 상승을 위해 반드시 필요해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전문가의 분석은 삼성이 AI 시대에 대응하기 위한 고성능 반도체 기술 개발이 시급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는 "문제는 HPC용이 아닌 D램의 경우 중국 스마트폰과 PC 업체의 시장 지배력으로 인해 저가 공세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미국 관세 정책도 HPC용 대비 비우호적이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는 삼성이 현재의 주력 제품군에서 벗어나 고부가가치 영역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외국계 증권사 중에는 삼성전자 목표주가를 '8만원대'로 제시한 곳도 나왔다. 씨티증권은 삼성전자 목표주가를 8만3000원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고성능 반도체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이재용 회장이 '사즉생'의 각오로 위기에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한 메시지와 맞닿아 있으며, 삼성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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