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화그룹이 역대 최대 규모 유상증자를 둘러싼 논란 속에서 김승연 회장의 지분 증여라는 파격적 카드를 통해 승계 구도를 공식화하며 정면돌파를 시도하고 있다. 이는 재계에서 '상남자'로 불리는 김승연 회장의 직선적인 경영 스타일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결단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지난달 발표한 3조6000억원 규모 유상증자에 대해 금융감독원이 이례적인 속도로 제동을 걸었다. 함용일 금감원 자본시장회계부문 부원장은 "다양한 자금 조달 방법이 존재하는데도 왜 유상증자를 택했는지 투자자들에게 충분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며 "증자 전후 한화그룹의 지분 구조 재편이 회사에 미치는 영향도 명확히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응해 김승연 회장은 ㈜한화 지분 22.65% 중 절반인 11.32%를 세 아들에게 전격 증여하는 결단을 내렸다. 장남 김동관 부회장에게 4.86%, 차남 김동원 사장과 삼남 김동선 부사장에게 각각 3.23%씩 배분했다.
이번 증여로 김동관 부회장은 자신이 직접 보유한 지분 9.77%에 한화에너지(3형제가 100% 지분 보유)의 ㈜한화 지분 22.16% 중 자신의 몫을 합산해 실질적으로 20.85%의 의결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로써 김동관 부회장은 ㈜한화의 사실상 최대주주로 올라서며, 만 73세 김승연 회장에서 만 42세 김동관 부회장으로 한화그룹의 경영권이 공식적으로 넘어가게 됐다. 이는 일반적인 재계의 승계 시기보다 훨씬 빠른 결단으로, 김 회장의 미래를 내다보는 경영 철학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금융감독원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유상증자가 단순한 기업 성장자금 확보를 넘어 그룹 지배구조 개편과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특히 증자 직전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김승연 회장의 세 아들이 지분 100%를 보유한 한화에너지와 한화임팩트가 보유한 한화오션 지분 7.3%를 1조3000억원에 매입한 점이 도마 위에 올랐다. 이는 자체 자금으로 계열사 지분을 정리한 뒤 사업 투자자금은 유상증자로 충당하는 방식이 주주들에게 불리하다는 지적을, 불러일으켰다.
더욱이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지난해 2조5400억원의 순이익을 올리고 2조9680억원의 현금성자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향후 3년간 10조원에 육박하는 영업현금흐름이 가능하다는 전망도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대규모 유상증자를 단행한 이유에 대해 시장은 의구심을 제기했으며, 이에 따라 발표 직전 78만1000원까지 올랐던 주가는 발표 후 63만원으로 급락했다.
김승연 회장의 지분 증여는 이러한 논란을 일거에 잠재우기 위한 전략적 결정으로 보인다. 한화그룹은 이번 유상증자가 승계와 무관하다고 재차 강조하며, 방위산업 수주를 위해 한화오션의 모회사로서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신용등급 향상이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신용평가회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와 피치가 정한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신용등급은 BB+로, 한화오션(B+)보다 높지만 경쟁사인 라인메탈(BBB+)과 탈레스(A)보다는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한화그룹은 "부채비율 등을 낮게 유지해 신용등급을 올리기 위해서라도 유상증자는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김승연 회장의 지분 증여로 경영권 승계가 완료됨에 따라 시장에서 우려했던 한화에너지와 ㈜한화의 합병 가능성도 사라졌다. 한화그룹은 "증여로 경영권 승계가 완료되면서 합병할 이유가 없어졌다"고 명확히 선을 그었다. 이는 그동안 시장에서 제기되었던 '합병을 통한 3형제 지배력 강화' 우려를 불식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책임경영 차원에서의 실천도 이어졌다. 유상증자에 대한 시장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김동관 부회장을 비롯한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임원 49명은 총 90억원 규모의 자사주를 매입했다. 또한 최대주주인 ㈜한화는 유상증자에 9800억원을 출자하며 회사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표명했다.
김승연 회장의 지분 증여 결정 이후 4월 1일 유가증권시장에서 한화그룹 주가는 전반적으로 상승세를 보였다. ㈜한화는 전날 대비 5.49% 상승한 4만3200원,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7.34% 오른 67만3000원에 거래를 마쳤으며, 한화솔루션(8.15%)과 한화오션(3.43%), 한화시스템(5.76%)도 일제히 상승했다. 이는 시장이 김승연 회장의 결단에 긍정적으로 반응했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증권가에서는 이번 지분 증여가 한화의 불확실성 해소 측면에서 긍정적이라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최관순 SK증권 연구원은 "김 회장의 세 아들이 100% 보유하고 있는 한화에너지가 상장을 준비하면서 한화 주가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며 "이번 지분 증여로 한화에너지 상장 이후 한화 주가 하락에 대한 우려는 크게 감소했다"고 설명했다. 양지환 대신증권 연구원은 "한화는 승계와 관련해 변칙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를 시장에 표명했다"고 평가하며 "할인 요인이 축소되며 지분 및 영업가치를 재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번 증여에 따라 김승연 회장의 세 아들은 총 2218억원의 증여세를 납부해야 한다. 이는 재계에서 손꼽히는 '화끈한 납세' 사례로 남을 전망이다. 김 회장은 1981년 경영권을 물려받을 당시에도 277억원을 자비로 납부한 바 있어, 정상적인 세금 납부를 통한 승계 방식을 일관되게 고수하고 있다. 한화그룹은 일각에서 제기된 "주가가 낮을 때 증여했다"는 의혹에 대해 "증여세는 4월 30일을 기준으로 앞뒤 2개월 주가의 평균 가격으로 결정된다"며 "의도적으로 주가를 낮췄다는 주장은 불가능하다"고 강하게 반박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현재 금감원의 요구에 따라 증권신고서 정정 공시를 위한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유상증자로 확보한 자금 사용처를 더 상세히 설명하라는 금감원의 요구에 따라 투자 계획을 구체화하는 것이 관건이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타법인 증권 취득에 배정한 2조4000억원 중 8000억원은 호주 조선·방산 기업 오스탈에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으나, 나머지 금액은 동유럽·사우디아라비아 지역 합작법인(JV) 설립 구상 정도만 공개한 상태다. 방산업계 특성상 국가 대 국가 계약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아 미래 투자 대상을 구체적으로 공개하기 어렵다는 점이 정정 신고서 작성의 난제로 작용하고 있다.
금감원 심사를 통과하면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본격적인 투자 행보에 나설 계획이다. 업계에서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김동관 부회장이 주도하는 방산 부문의 핵심 기업으로서 이를 발판 삼아 그룹의 중간 지주회사로 변모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특히 김 회장의 지분 증여로 승계 구도가 확고해진 만큼,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성장 여부가 김동관 부회장의 경영 능력 평가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김승연 회장의 이번 결단으로 한화그룹은 창업주 고 김종희 회장의 1.0 시대, 김승연 회장의 확장기인 2.0 시대를 지나 김동관 부회장을 중심으로 한 '3세 경영' 3.0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게 됐다. 김 회장은 1981년, 불과 29세의 나이로 그룹을 맡아 44년 동안 한화를 이끌었다. 위기 때는 구조조정, 기회 때는 공격적 인수합병으로 그룹을 키웠고, 최근에는 방산·우주·에너지 등 미래 산업에 집중 투자하며 한화그룹을 재계 7위의 대기업집단으로 성장시켰다.

김동관 부회장은 2010년 그룹에 합류해 태양광·우주산업 등 핵심 미래사업을 주도하며 경영 능력을 입증해 왔다. 차남 김동원 사장은 금융을, 삼남 김동선 부사장은 호텔·유통 등 비핵심 사업을 담당하는 3형제 책임경영 체제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이번 승계 결정은 각 형제가 전문성을 갖춘 영역에서 책임과 권한을 명확히 하는 '산업별 책임경영 체제'의 완성이라는 의미도 갖는다.
김승연 회장의 이번 결단은 꼼수 승계 대신 '정공법'을 통해 이뤄진 대기업 경영권 승계의 모범적 사례로 평가될 전망이다. 재계에서는 '상남자' 김승연의 파격적인 결단이 한화그룹의 미래 성장과 안정적인 세대 교체, 그리고 기업 가치 상승으로 이어질지 주목하고 있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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