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K그룹은 고(故) 최종현 선대회장의 경영 활동과 철학이 담긴 13만여 건의 기록물을 디지털화한 '선경실록'을 완성했다고 2일 밝혔다.
이 프로젝트는 2023년 '창사 70주년 어록집' 제작 과정에서 옛 자료의 역사적 가치를 재발견하면서 시작됐으며, 약 2년간의 노력 끝에 최근 완료되었다. 이는 한 기업의 역사를 넘어 한국 근현대 경제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될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선경실록'에는 오디오·비디오 약 5,300건, 문서 3,500여 건, 사진 4,800여 건 등 총 1만7,620건, 13만1,647점의 자료가 포함됐다. 특히 최 선대회장의 음성 녹취는 오디오 테이프로만 3,530개에 달해, 하루 8시간씩 연속으로 들어도 1년 이상이 걸리는 방대한 분량이다. SK는 그룹 수장고에 장기간 보관해 온 이 귀중한 자료들을 최신 기술을 활용해 디지털로 변환하고 영구 보존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8시간 들어도 1년 이상 걸리는 방대한 분량
최종현 선대회장은 SK그룹의 2대 회장이자 현 최태원 회장의 아버지로, 1970~1990년대 한국 경제 성장기를 이끈 주역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사업 실적·계획 보고, 구성원과의 간담회, 각종 회의와 행사 등을 녹음해 원본으로 남겼다. 이는 그룹의 경영 철학과 기법을 발전시키고, 궁극적으로 한국 기업 경영의 수준을 높이기 위한 목적이었으며, 이러한 방침은 'SK 고유의 기록 문화'로 계승됐다고 SK 측은 설명했다.
덕분에 SK 고유의 경영관리체계인 SKMS(SK Management System)를 정립하고 전파하는 과정, 그룹의 중요한 의사결정 순간에서 임직원과 토론하는 장면, 국내외 저명인사와의 대담 내용 등이 상세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이번 실록에는 최 선대회장의 경영 철학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 경제계의 분위기와 시대적 상황까지 생생하게 담겨 있어 역사적 가치가 크다.
최 선대회장의 생생한 육성 녹음에는 당시 경제 상황, 한국 기업인들의 사업보국 의지, 그리고 크고 작은 위기를 극복해 온 경영인의 혜안이 담겨 있다. 1980년대 중반 정치적 불안이 고조되던 시기, 선경 임원·부장 신년 간담회에서 최 선대회장은 "상당수 사람이 '최근 정치 불안이 커서 경제 큰일 나는 거 아니에요?'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우리는 가장 리얼리티를 걷는 기업가들이니까 불안 요소 때문에 괜히 우리까지 들뜰 필요는 없다"며 "우리가 정치가 불안할수록 경제까지 망가지면 안 된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경제가 나빠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는 정치적 불확실성 속에서도 경제의 주체인 기업가들이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인재 등용에 관한 통찰력도 주목할 만하다. 1982년 신입사원과의 대화에서 그는 "땅덩어리가 넓은 미국에서도 인재라면 외국 사람도 쓰는 마당에 한국이라는 좁은 땅덩어리에 지연, 학연, 파벌을 형성하면 안 된다"며 한국의 '관계지상주의'를 타파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진보적인 인재관으로, 국적과 배경을 넘어 실력 중심의 평가와 등용을 중시하는 그의 철학을 보여준다.
R&D와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에 대한 선견지명은 특히 인상적이다. 1992년 임원 간담회에서는 "R&D 투자해서 (기술 개발) 성공했는데 돈은 안 벌린다. 그러면 R&D 예산이 깎인다"며 "R&D 직원도 시장 관리부터 마케팅까지 해봐야 비로소 돈이 모이는 걸 알고 연구도 더 열심히 하고, 성공도 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연구개발이 시장 요구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실용적인 관점을 보여준다.
같은 해 SKC 임원들과의 회의에서는 "자동차를 한 사람이 10대 이상 갖는 게 아니고 텔레비전, 냉장고도 한 집에 5, 6대씩 있는 집은 없지 않으냐"며 하드웨어 산업의 성장 한계를 지적했다. 그는 "플로피디스크를 팔면 1달러지만, 그 위에 소프트를 얹으면 한 20배가 된다. 하드웨어는 20%, 80%는 소프트로 가야 된다"며 소프트웨어 산업의 중요성과 부가가치 창출 가능성을 강조했다. 이는 현재 SK그룹이 반도체와 같은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와 서비스 영역으로 사업을 확장한 방향성과도 일맥상통한다.

“이익 나면 특별보너스 500%도 줄 수 있어”
노사 관계에 대한 최 선대회장의 철학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1989년 기업이미지 조사 결과 보고 자리에서 "이익이 나면 (특별보너스를) 100%도 줬다가 200%도 줬다가 심지어 500%도 줄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며 "'화합의 경영법'을 해서 이익이 많이 나면 (노사가) 같은 이득이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경영법을 가져온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성과 공유를 통한 노사 간 신뢰 구축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관점이었다.
환경에 대한 인식도 당시로서는 앞서 있었다. 1990년대 중반 유럽 한 국가의 왕세자 면담을 위해 준비한 보고서에는 앞으로 기후위기가 심각한 국제문제가 될 것이라며 법정기준치보다 훨씬 낮은 환경기준을 맞추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제안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SK의 주요 역사적 순간들도 '선경실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세계경제 위기를 몰고 온 1970년대 1·2차 석유파동 당시 정부의 요청에 따라 최 선대회장이 중동 고위 관계자를 만나 석유 공급에 관한 담판을 짓는 내용, 1992년 이동통신사업권을 반납할 때 좌절하는 구성원들을 격려하는 상황 등이 녹음됐다. 특히 통신 사업과 관련된 기록은 이후 SK텔레콤이 한국 이동통신 시장의 선두주자로 성장하는 과정의 초기 역사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이 밖에도 타 그룹 총수들과 산업 시찰에서 나눈 대화, 외국 담배회사가 한국 내 유통 협업을 제안하자 '돈은 틀림없이 되겠지만, 기업 문화와 맞지 않는다'며 "비즈니스는 결국 신용"이라고 거절한 일화, 심지어 김장김치 보관법까지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가 담겼다. 이런 소소한 내용들까지 포함된 것은 최 선대회장이 경영뿐 아니라 일상의 다양한 측면에도 관심을 기울였음을 보여준다.
SK는 이러한 디지털 아카이브를 그룹 고유의 경영 철학인 SKMS와 수펙스(SUPEX·인간 능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 추구 문화 확산 등을 위해 활용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수펙스는 'Super Excellent Level'의 약자로, 인간의 능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을 추구한다는 SK그룹의 경영 철학이다. 현재는 내부용으로 활용하면서 향후 외부 공개 여부도 검토할 계획이다. 만약 외부에 공개된다면, 한국 경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SK 관계자는 "최 선대회장의 경영 기록은 한국 역동기를 이끈 기업가들의 고민과 철학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보물과 같은 자료"라며 "양이 매우 많고 오래돼 복원이 쉽지 않았지만, 첨단기술 등을 통해 품질을 크게 높일 수 있었다"고 전했다. 이번 디지털 아카이브 작업은 역사적 기록을 보존하고 활용하는 기업 아카이빙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을 만하며, 다른 기업들에게도 귀중한 자료의 보존과 활용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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