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그룹 가문의 혼맥은 한국 재계와 문화예술계를 연결하는 독특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삼성가의 딸로 태어난 이명희 회장은 결혼과 가족관계를 통해 경제적, 문화적 영향력을 확장해왔으며, 그러한 배경은 신세계그룹이 유통 분야를 넘어 다양한 사업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특히 차세대 경영인들의 혼인 관계는 문화예술계와의 연결고리를 더욱 강화하며 그룹의 미래 방향성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43년생인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은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막내딸로, 이화여고와 이화여대 미대를 졸업했다. 막내딸이라는 위치에서 아버지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이명희는 처음부터 경영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1967년 정재은과 결혼한 후 한동안 가정주부로 지내다가, 1979년 37세의 나이에 아버지 이병철 회장의 권유로 신세계백화점 영업담당 이사로 경영에 참여했다.
이명희-정재은, 재계 명문가의 만남
결혼 초기 이명희는 전형적인 재벌가 며느리로서의 삶에 충실했다. 신세계 경영에 뛰어들기 전 약 12년간 가정주부로 지내며 두 자녀 정용진과 정유경을 키우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이명희는 백화점 고객으로서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날카로운 시각을 길렀고, 후일 이러한 경험은 신세계 경영에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1979년 이명희가 신세계백화점 이사로 경영에 참여하게 되면서 부부는 각자의 분야에서 활약했다. 정재은은 기업 경영보다는 사회활동과 자선사업에 관심을 기울였고, 이명희의 경영 활동을 뒤에서 묵묵히 지원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50년 이상 이어지며 한국 재계의 모범적인 부부로 알려져 있다.
그들의 가정 생활은 엄격함과 따뜻함이 공존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명희는 자녀 교육에 있어 어머니로서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지만, 정재은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교육관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균형 잡힌 가정 환경이 정용진과 정유경이 독립적인 경영인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명희는 아버지 이병철의 가르침이었던 "의심스러워 믿지 못하면 아예 쓰지 말고, 일단 사람을 쓰면 의심하지 마라", "남의 말을 경청하라", "알아도 모르는 척, 몰라도 아는 척하지 말라"를 경영 철학으로 삼아왔다. 이러한 철학은 전문 경영인을 신뢰하고 맡기는 '신뢰 경영'으로 이어져 신세계그룹의 성장 동력이 되었다.
1997년 신세계그룹이 삼성그룹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분리될 당시 백화점과 조선호텔만 운영하며 총매출 1조 8,000억 원 규모였던 신세계는 2023년 기준 약 44조 원의 매출을 기록하는 유통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특히 1993년 문을 연 국내 최초의 할인점 이마트는 2023년 약 26조 원의 매출을 달성하며 그룹의 성장을 견인했다.
정용진-한지희, 경영과 문화예술의 만남
이명희와 정재은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1968년생)은 서울대 서양사학과를 다니다 미국 브라운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1994년 삼성물산에 입사해 1995년 신세계로 옮겨 본격적인 경영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정용진의 첫 결혼은 1995년 배우 고현정과의 만남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CF 모델로 활동하던 고현정과 신세계그룹 후계자인 정용진의 결혼은 재계와 연예계의 화제의 결합이었다. 1996년 결혼 후 두 사람은 정해찬(1998년생)과 정해인(1999년생) 1남 1녀를 두었으나, 7년간의 결혼 생활 끝에 2003년 이혼했다.
이혼 후 정용진은 약 8년간 독신으로 지내며 신세계와 이마트의 사업 확장에 집중했다. 이 시기 그는 이마트의 비약적 성장을 이끌며 경영자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았다. 2011년, 정용진은 12세 연하의 플루티스트 한지희와 재혼했다. 작고한 한상범 대한항공 부사장의 딸인 한지희는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 예비음대를 졸업하고 프랑스와 미국에서 음악을 공부한 재원으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클래식 음악에 대한 공통된 관심사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정용진은 평소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많았고, 한지희의 연주 모습을 보고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정용진은 재혼 후 2013년에 이란성 쌍둥이를 낳아 2남 2녀의 아버지가 됐다.
한지희는 결혼 후에도 활발한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현재 성신여대 객원교수로 재직하면서 국내외 무대에서 연주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22년에는 서울시립교향악단과의 협연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예술가로서의 한지희의 활동은 신세계그룹의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과 투자를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용진과 한지희 부부는 자녀 교육에 있어 예술과 인문학적 소양을 중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의 자녀들은 국제학교에 재학 중이며, 음악, 미술 등 다양한 분야의 교육을 받고 있다고 전해진다. 정용진은 바쁜 경영 활동 중에도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중요시하며, 자녀들과 함께 영화 관람, 전시회 방문 등의 문화 활동을 즐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용진은 현재 신세계그룹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으며, 디지털 혁신과 신사업 발굴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20년 이후 그는 온라인 사업 강화에 주력해 SSG닷컴의 성장을 이끌며 이커머스 경쟁력을 강화했다. 또한 2023년부터는 AI와 데이터 기반의 퍼스널 쇼핑 경험을 제공하는 '스마트 리테일'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정용진은 SNS를 통한 소통으로도 유명하며,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100만 명이 넘는 '소통형 경영인'으로 자리매김했다. 2024년 초에는 MZ세대를 겨냥한 '노브랜드' 제품군을 대폭 확대하고, 식품 분야에서는 대체육, 대체단백질 등 친환경 푸드테크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
2024년 10월 30일, 신세계그룹은 백화점 부문과 이마트 부문의 계열 분리를 공식화하면서 정용진은 이마트 회장으로 독립 경영에 나서게 되었다.
정유경 신세계그룹 회장(1972년생)은 서울예고와 이화여대 미대를 졸업하고 미국 로드아일랜드대학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했다. 그녀는 1996년 조선호텔 마케팅담당 상무보로 입사해 2009년 신세계백화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유경-문성욱,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인연
정유경은 2001년 초등학교 동창인 문성욱 신세계인터내셔널 부사장과 결혼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서울 강남의 한 초등학교에서 시작되었지만,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른 곳에서 다니면서 잠시 멀어졌다가 성인이 된 후 우연한 기회에 재회하면서 결혼으로 이어졌다.
문성욱은 미국 시카고대학과 펜실베이니아 와튼스쿨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재원으로, 글로벌 경영 감각과 패션 산업에 대한 안목을 갖추고 있다. 신세계그룹에 합류하기 전에는 글로벌 컨설팅 회사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현재는 신세계인터내셔널에서 해외 패션 사업을 총괄하고 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유통과 패션, 디자인 분야의 전문성을 갖춘 두 인재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시너지 효과가 컸다. 정유경의 디자인 감각과 문성욱의 경영 전문성은 신세계그룹의 패션 사업 확장에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결혼 후 두 사람은 문서윤(2002년생)과 문서진(2005년생) 두 딸을 두고 있다. 정유경 회장은 바쁜 경영 활동 속에서도 자녀 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특히 예술과 창의성 개발을 중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딸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패션, 디자인, 미디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정유경 부부는 대외적인 활동보다는 가족 중심의 생활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정유경 회장은 오빠 정용진과 달리 공개 활동을 최소화하는 '은둔형 경영자'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어 모친 이명희와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족과의 시간을 중요시하는 정유경은 여가 시간에 딸들과 함께 미술관이나 디자인 전시회를 방문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전해진다.
정유경은 2015년 신세계 총괄사장으로 승진한 후, 2024년 10월 30일 부회장을 건너뛰고 바로 회장직에 올라섰다. 이로써 신세계그룹은 '정용진의 이마트'와 '정유경의 신세계'로 공식 분리되었다.
정유경이 경영자로서 내세우는 가치 중 하나는 '숫자'다. "숫자적 이익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모든 임직원의 일치단결한 목표이자 기업을 영속하게 만드는 힘"이라는 게 정 회장의 이야기다. 그는 신세계 임원들에게 "리더는 명확한 숫자 목표를 설정하고 조직의 역량을 집결해야 한다"고 주문해왔고, 총괄사장 취임 후 8년 만에 매출과 이익을 두 배 이상 성장시킨 것으로 자신의 경영 신념을 증명해 보였다.
정유경이 총괄사장에 오른 2015년은 '백화점의 시대는 끝났다'는 이야기가 나오던 때였다. 인구 감소로 인해 지역 경제 침체가 길어지고 이커머스 공습까지 덮치며 오프라인 유통가의 미래가 어둡다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그럼에도 정유경은 '과감한 역발상'과 '추진력'을 바탕으로 백화점 본업의 가치를 높이는 데 속도를 냈다. 대표적 사례가 2016년 12월 창사 이래 단일 점포 기준 최대 규모를 투자해 세운 대구신세계다. 대구신세계는 개점 1년 만에 대구 지역 매출 1등 백화점이 됐고 4년 만인 2021년 국내 백화점 중 가장 짧은 기간에 연매출 1조원을 돌파했다.
정유경은 오빠 정용진과 다르게 공개 활동을 최소화하는 경영자다. 가장 최근에 포착된 공개석상은 2023년 9월 '신세계×프리즈 서울 VIP 파티'였고, 그 전에는 2016년 신세계백화점 대구점 개점 행사였다. 은둔형 경영자로 손꼽혀온 이명희의 행보와 많이 닮아 있어 '리틀 이명희'로 평가받고 있다.
국내외 패션·뷰티 산업 및 디자인 계열 인맥이 두터운 정유경은 '글로벌 네트워킹'을 사업에 적극 활용한다. 미국 명품 브랜드 크롬하츠의 공동 설립자이자 디자이너인 리처드 스타크, 존 바우만, 레오나드 캄호트와는 글로벌 패션 트렌드에 관한 의견을 공유하는 사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크롬하츠는 국내 유통업계 중 유일하게 신세계백화점에 입점했다. 에르메스, 루이비통, 샤넬을 가장 많이 보유한 국내 백화점을 실현한 데도 글로벌 네트워킹의 힘이 컸다.
정유경 장녀 문서윤, 10만 팔로어 인플루언서
정용진 자녀들 중 장남 정해찬(1998년생)은 미국 코넬대학에서 호텔경영학을 전공하고 2018년 신세계그룹 계열인 웨스틴 조선 서울에서 인턴으로 활동했다. 그는 2023년 군 제대 후 삼정KPMG에서 인턴십을 마쳤으며, 2024년 6월 미국 유명 금융사에서도 인턴 활동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는 미국 인디애나대에서 스포츠·피트니스 산업 관련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유경의 장녀 문서윤(2002년생)은 컬럼비아대학에 재학 중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인스타그램에서 10만 팔로어를 거느린 인플루언서로 활동하고 있다. 2024년 초 YG 출신 프로듀서 테디가 이끄는 소속사 더블랙레이블의 새 걸그룹 멤버 후보로 언급된 적 있으나, 해당 걸그룹에는 합류하지 않았다.
최근 서윤 씨가 자신의 영어 이름인 애니(Annie)와 여동생의 영문명 테일러(Taylor)를 활용한 상표를 여러 개 등록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패션·뷰티 브랜드를 론칭할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정해찬 씨와 문서윤 씨 모두 현재 회사 지분은 보유하고 있지 않다. 업계에서는 이명희가 각각 10%씩 보유한 이마트, 신세계 지분의 향배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한국CXO연구소는 "증여 또는 상속을 통해 정용진, 정유경에게 각각 넘어가게 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이는 두 자녀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어서 마지막까지 주식을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점쳐진다"고 분석했다. 일각에서는 정용진, 정유경이 아닌 '오너 4세'를 지분 증여의 대상으로 할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교육과 전문성 중시하며 차세대 경영인 역량 강화
신세계그룹 가문의 혼맥은 세 가지 주요 특징을 보인다. 첫째, 삼성가에서 출발한 뿌리와 전통적인 재계 인사들과의 연결을 통해 탄탄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둘째, 문화, 예술, 미디어계와의 연결을 통해 그룹의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전략을 구사했다. 셋째, 교육과 전문성을 중시하는 경영 철학으로 차세대 경영인들의 역량 강화에 집중해왔다.
이러한 혼맥 전략은 신세계그룹이 전통적인 백화점 비즈니스에서 출발해 할인점, 온라인 유통, 식품, 패션, 호텔 및 리조트, 부동산 개발 등으로 사업 영역을 다각화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3세대로 이어지는 가업 승계 과정에서 안정적인 경영권 유지와 함께 새로운 비즈니스 발굴에도 기여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2024년 10월 백화점-이마트 계열 분리가 공식화됨에 따라 신세계그룹은 '정용진의 이마트'와 '정유경의 신세계'로 새로운 성장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정용진, 정유경 형제를 중심으로 한 신세계 3세대 경영진은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의 소비 트렌드를 선도적으로 파악하고 대응하며, 특히 콘텐츠와 커머스의 융합, 라이프스타일 플랫폼으로의 확장 등 미래 지향적 사업 모델 발굴에 주력하고 있다. 4세대인 정해찬, 정해인, 문서윤, 문서진 등의 자녀들도 각자의 관심 분야에서 전문성을 키우며 그룹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2025년을 기점으로 신세계그룹은 유통 산업의 디지털 혁신을 선도하며, K-리테일의 글로벌화와 함께 문화, 콘텐츠, 라이프스타일을 아우르는 종합 플랫폼 기업으로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에는 첫 번째만 현재 직책과 직함을, 이후에는 이름만 표기했음을 알려드립니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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